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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NHK 재난 보도

Joyfule 2011. 3. 17. 00:02

보고 배워야
[만물상] NHK 재난 보도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11.03.15 22:37

일본 공영방송 NHK 기자들이 지진과 태풍 같은 재난을 당한 사람을 취재할 때 맨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 당해 고통이 많으시겠습니다" 또는 "힘 내십시오"다. 기자들은 재난 피해자 사진을 찍을 땐 허락을 받고 찍는다. 도시락은 취재원 눈에 띄지 않게 차 안에서 먹는다. 공중전화는 재난 피해자가 먼저 써야 하므로 휴대전화를 쓴다. 'NHK 재난 취재·보도 매뉴얼'에 세심하게 마련된 현장취재 규정들이다.

▶매뉴얼은 재난을 보도하는 요령도 자세히 정해 뒀다. 앵커나 기자는 무심코라도 '크다(大)' '심하다(激)' '매섭다(烈)'는 표현이 들어간 말을 써선 안 된다. 시청자들을 흥분시키고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진은 '상당한 진동' '강한 지진' 정도의 표현까지만 할 수 있다. '○○할 것 같다'는 불확실한 표현, '전멸(全滅)' 같은 과장된 표현도 쓰면 안 된다.

▶NHK는 국민이 내는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인 만큼 재난이 일어났을 때 신속·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내세운다. 재난 보도의 목표는 재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모범적인 재난 보도 요령을 몸에 익히기 위해 매일 밤 NHK 뉴스센터에선 가상 재난 보도 훈련이 벌어진다. NHK 도쿄 본사의 재난 보도 책임자들은 비상시 달려올 수 있도록 회사로부터 반경 5㎞ 안에 살아야 한다.

▶일본 사상 최악의 3·11 대지진에서도 NHK의 재난 보도는 빛났다. NHK 앵커와 기자들은 수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0만 이재민을 낸 참극을 전하면서도 여느 때처럼 목소리가 조용조용했다. NHK 화면에는 시뻘건 불길이나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대신 수도·전기·가스·교통·병원 정보와 주민 대피에 필요한 정보는 몇 번씩 반복해 내보냈다.

▶일본의 재난에 더 흥분한 것은 한국의 방송들이었다. 공영·민영 할 것 없이 '통곡' '궤멸' '아비규환' '아수라장' '초토화' '유령도시' '쑥대밭' '암흑천지' 같은 말들이 넘쳐났다. 도로는 '완전히' 제 기능을 잃었고, 해일은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으며, 도시는 '통째로' 사라졌다고 했다. 일본 국민이 대재앙에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외신이 "인류 정신의 진보를 봤다"고 한 데엔 일본이 좋은 공영방송을 지닌 덕도 클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15/20110315027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