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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대하여 / 박완서

Joyfule 2014. 7. 24. 08:44

 

 

사진에 대하여 / 박완서

 

 

일전에 공자의 고향인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다녀왔다. 산둥성은 예부터 우리나라의 황해도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가까운 거리라는 친밀감 때문인지 거의 외국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맹자의 고향인 쩌우청(鄒城)을 거쳐 공묘, 공부, 공림 등 유교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서 태산에 올랐을 때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가까이까지 갔으니까 올랐다고 해서 등산을 한 건 아니다. 케이블카를 내린 지점에서 정상까지는 계단이 잘 조성돼 있고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라고 하는데도 그 전날 공자 맹자의 광대한 유적지를 걸어다닌 후유증 때문에 조금 오르다 말고 찻집과 전망대가 있는 데서 동행 몇이 함께 처지게 되었다.

잠시만 쉬고 있어도 뭘 사라는 잡상인이 몰려들기는 평지의 시중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 중에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라고 성화를 하는 사진사도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견본 사진에 의하면 정상에 안 올라가고도 정상에 오른 것처럼 찍는 거였다. 나도 재미 삼아 찍었더니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는 정상의 비를 배경으로 아래로는 작은 산봉우리와 망망한 운해가 보이는 멋들어진 사진이 나왔다. 나는 그런 조작이 길바닥에 있는 작은 노점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물건을 속아 사는 것도 여행의 재미이듯 곧 유쾌한 추억이 되었다.

집에 와서 손녀에게 그 사진을 보였더니 단박 가짜라는 걸 알아보았다. 가짜라도 아주 허술하게 만든 가짜라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은 나도 사진의 사실성을 안 믿게 된 지는 오래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그걸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서 재생시켜 한 장의 디스켓으로 만드는 걸 옆에서 구경한 적이 있다.


그 과정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아내가 자기 얼굴이 너무 크니 작게 만들어달라니까 간단히 작게 만드는 걸 봤는데 그때만 해도 어찌나 황당하던지. 나도 사진에 찍히는 내 얼굴이 예쁘고 젊게 나오기를 바라지만 찍는 사람이 나의 좋은 면이나 좋은 순간을 포착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 기술상의 조작에 의하여 예뻐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게 만든 사진이 나의 실체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면서 취미로 인물이면 인물, 식물이면 식물만 집중적으로 찍어서 컴퓨터로 동호인끼리 돌려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내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된다.

내 딸도 뒤늦게 그 기계에 빠져 주로 꽃을 많이 찍는다. 꽃들은 아무런 조작 없이도 실물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한번은 도라지꽃을 찍었는데 촌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와서 그다지 예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다고 여긴 보라색 꽃잎에 인간의 실핏줄 같은 섬세한 그물망이 진보라로 도드라져 보이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작은 풀꽃들도 카메라에 찍혀 화면으로 재생시키면 깜짝 놀라게 아름다운 꽃이 된다.
평소 거기 있는 줄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냉이꽃도 사진 상으로는 장미꽃과 동등하게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장미꽃과 냉이꽃의 미는 동등하지 않다. 예술사진이라는 말도 있고 그 분야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사진의 기능은 현실을 고정시켜 놓는 정직한 사실성에 있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장미꽃과 냉이꽃이 동등해지는 건, 그 비현실성 때문에 곧 흥미를 잃게 되었다.

취푸에 갔다 온 후 쌓인 우편물을 정리하다보니 8·15해방에서 한국전쟁과 종전까지의 흑백 기록사진을 정리한 두툼한 사진집이 들어 있었다. 기록사진으로 남은 해방 당시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거리거리로 쏟아져 나와 해방에 환호작약하던 군중의 모습보다 훨씬 소규모고 조촐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기억보다는 그 때의 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 기억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군중 하면, 해방 때보다는 4강에 든 월드컵 축구경기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경기 때의 거리응원을 떠올릴 정도로 덧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억이란 그렇게 믿을 게 못된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편한 마음으로 사진첩을 넘길 수가 있었다. 다음에 나온 6·25전쟁에서부터 종전까지의 기록사진을 보면서 나는 거의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으로 가슴을 움켜쥐기도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 기억 속의 가장 어두운 면, 생생한 지옥도가 거기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었다. 완전히 초토화되고 굴뚝만 남은 사대문 안의 서울, 무자비한 즉결처분, 자기가 곧 살해돼 묻힐 구덩이를 파는 양민들, 총부리 앞에 벌벌 기면서, 혹은 엉터리로 급하게 그린 태극기를 보이며 목숨을 애걸하는 젊은이, 시체 더미 또 시체 더미, 그건 절대로 지울 수도 덧칠할 수도 없는 내 기억의 원판이었다.


나는 내가 그 잔혹한 시대를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장수까지 누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생존이 기적 같다고 해서 죽은 피붙이들 몫까지 내가 더 잘 살고, 그들의 몫까지 좋은 일을 많이많이 하고 살아야지 하는 기특한 생각 같은 걸 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나는 그 끔찍한 기억과 더불어 사는 것만도 지겹고 힘들다.

겉보기에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잘 사나. 먹을 게, 입을 게 도처에 넘치고 사람 사는 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그런 집들이 다 몇 십억씩 한다고 생각하면 자꾸자꾸 하늘 향해 더 지어서 팔면 지구상에서 제일 부자나라라는 미국 땅도 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무식한 소리지만 국부를 축적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것이거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다 번쩍번쩍 빛나고 휘황한 총천연색들이다. 나도 뒤질세라 그 와중에 잘 적응해 사는 것 같다가도 내가 지금 보고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지 싶을 때가 내가 가장 현실감이 들 때라는 이 기막힌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은 근본은 못 속인다는 말이 있다. 그 흑백 사진집을 보고 받은 충격은, 잊고 싶은 내 남루한 근본과 불의에 마주친 충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