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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民族중 가장 먼저 공산주의를 비판한 사람은 李承晩!

韓民族중 가장 먼저 공산주의를 비판한 사람은 李承晩! 〈우리 韓族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요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趙甲濟 孫世一씨가 월간조선에 연재하고 있는 '李承晩과 김구' 평전 2005년 8월호에 1923년에 李박사가 쓴 공산주의 비판글이 소개되어 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공산주의 사상이 세계를 풍미하던 이런 시기에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그 문제점을 짚어내었는가 감탄하게 된다. 공산주의의 위선과 악마성을 속속들이 안 李박사가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盧武鉉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국민들이 누리는 행복의 바탕이란 점을 상기하면서 일독을 권한다...

이승만 대통령 붓글씨의 도의 경지

이승만 대통령 붓글씨의 도의 경지 대한민국 장래도 그의 붓글씨처럼 밝고 위대하리라! 정 창 인 박사/자유통일한국 대표 기사입력 2008/4/06 10:52 예로부터 인물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중요시하였다. ‘신’은 신수(身手)를 의미하며 용모와 풍채를 나타낸다. ‘언’은 말씨로서 말하는 태도나 버릇을 의미하며, ‘서’는 문필로서 글과 글씨를 의미한다. ‘판’은 판단력을 의미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네 가지 덕목에 있어 모두 출중하였는데 그 중 ‘서’와 관련하여서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기록을 남긴 것이 있어 흥미롭다. 글이란 것은 말과 판단력과 직결되는 것이며 특히 학문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글씨의 경우 학문이 경지에 이른 사람의 경우에도 반드시 일정 수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

6.25 우리의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프란체스카 도너 리 / 6,25글 [6월 25일]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 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 정보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p.23 [26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

인간 이승만의 면모

인간 이승만의 면모 조선일보사 발행 『전환기의 내막』(윤치영,「제헌국회」, 1982, p.289) 발췌 "이박사와 나(윤치영)는 미소공위를 통한 좌우합작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의 공산화를 초래한다고 확신했다. 이미 불가리아, 헝가리 등 유럽국가들도 같은 형태로 공산화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미군정은 너무 안이했고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국제정세와 공산주의의 생리, 당시 한반도에서 좌익 세력이 기획하던 바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박용만, 내외신서, 1986, p. 46) 발췌 "이때만 해도 미군정하였고, 미군장교 한 사람만 잘 알아도 큰 출세, 큰 감투를 얻어 쓸 수 있었고, 미군 통역만 잘 해도 팔자는 고칠 수 있었던 판국이었는데 한국 국민의 일원 자격뿐인 李박사가 주한 미군사령관을..

이승만 재평가와 관련자들의 반발

이승만 재평가와 관련자들의 반발 [남시욱 칼럼] 4월혁명 주체들도 납득할 공정한 평가를 ▲ 이승만 대통령 올해로 4‧19 제50주년을 맞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연세대 유영익 석좌교수를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는 학술세미나가 개최된 바 있지만 올해 들어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 박사가 4월혁명으로 하야한지 올해로 반세기가 되었고, 그가 하와이에서 별세한지는 이미 45년이 흘렀다. 이제 그의 장기집권과 3‧15부정선거로 인해 부정일변도로 되어있는 그에 대해 거시적인 안목에서 공정한 평가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4월혁명 50주년 맞아 이승만 재평가 작업 활발 이 박사에게는 부산정치파동 때부터 정치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과오가 ..

哲人統治者'인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성

건국60주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위대성을 바로 알자 조영환 편집인 예수가 기독교의 시조(始祖)이고 부처가 불교의 시조이고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라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유대한민국의 시조이다.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독립투쟁은 오늘날 일류국가의 문턱에 있는 자유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조갑제 대표가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 자유대한민국과 공산북한집단의 차이는 바로 이승만의 위대한 정신과 김일성의 저질적 정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용기와 지혜와 신중함과 결단력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단연 어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도덕적 이상과 정치적 현실을 모두 포괄하고 고려하여 중용적 판단을 내리는 최고로 지혜로운 철인통치자로 평가된다. 미국의 정치사회윤리..

“이승만은 민주주의 뿌리 심은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 뿌리 심은 대통령” 4.19 혁명 주도적 참여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4.19 50주년을 왜곡된 평가 바로 잡는 계기로” “4.19혁명 50주년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위치를 재조명해주는 희년(禧年)정신 실천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50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으로 문리대 학생 데모를 준비, 조직하고 4.19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가 “이젠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재평가의 당위성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한국 갤럽과 한국논단이 실시한 한국 정치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친미사대주의자(53%), 반민주적 독재자(18%),..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 보학에 능한 한량형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 보학에 능한 한량형 이승만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둘째)이 미국으로 가기 전 아버지 경선공(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

휴전으로 망한 월남과 흥한 한국의 차이

가장 큰 원인은 한국엔 이승만이 있었고 월남엔 없었다는 점이다. 趙甲濟 1973년의 월남평화협정과 1953년의 한국 휴전협정은 다른 점이 많다. 1. 월남평화협정으로 駐越미군은 철군했는데 월남에 있던 월맹군은 철군하지 않았다. 2. 한국에선 駐韓미군은 남았고, 중공군은 철군했다. 3. 월남에서 17도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지켜지지 않았으나 휴전선은 지켜졌다. 韓美동맹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월남에선 17도선 관리를 베트콩과 월맹군이 장악했다. 4. 휴전 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월남에선 티우 정권이 약해졌다. 5. 월남에선 닉슨 대통령이 월남방어를 空約만 했으나 이승만은 韓美상호방위조약을 맺어 강제화했다. 6. 협정 이후 미국은 월남에서 발을 뺐으나 미국은 한국을 더욱 깊게 지원하게..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반탁운동 1945년 10월16일에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리던 중 1947년2월14일에 미국 군정청의 최고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중앙방송을 통하여 모범적 독립국가 건설과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 이라는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가 40년의 해외독립투쟁과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최초로 밝힌 ‘신국가 건설’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은 제헌국회 의장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심의 및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1948년7월에 이..

건국대통령 대한 예우가 이래서야...?

건국대통령 대한 예우가 이래서야...? 김유혁 지난 7월19일,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제43주기 추모식이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동작동)에서 거행되었다.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200여 명의 각계 인사들이 그 식전(式典)에 참례했다. 10시 정각에 강영훈 사업회장의 개회사로 추모행사는 시작되었다. 기도, 성경봉독, 설교, 고인의 말씀, 추모사, 분향, 유족인사, 찬송, 축도의 순서에 따라 추모식은 1시간여에 끝났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가뭄을 적시어주는 단비(甘雨)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인이 느끼는 섭섭함이 담긴 하늘의 눈물이라 할지…?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 비 내리는 한강 연도를 거니는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을 건립한 건국 대통령이며 ..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던 이승만 대통령

유럽에 가면 거대한 성당건물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빌어 지은 걸작이다. 성베드로 성당, 톨레도 성당, 노테르담 성당, 쾰른 성당, 바르셀로나의 미완성인 聖가족성당(가우디 설계), 스트라스부르흐 성당 등은 최단 200년, 최장 800년이 걸려 지은 성당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성당에는 여러 건축양식이 다 들어 있다.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등등 여러 양식의 부분 부분들이 하나의 종합된 예술품으로 서 있으니 더 감동적인 것이다. 역사의 기복과 문화의 나이테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랜 성당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골동품이나 구경거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예..

육군 참모 총장이 이승만 제거 제의

육군 참모 총장이 이승만 제거 제의 再選 불가능 1952년 5월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23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李承晩의 再選 가능성을 어둡게 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이 터지고 언론이 정부 비판을 마음대로 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戰時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수많은 동료 의원들이 ‘서울死守’란 거짓 방송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鮮于宗源씨는 張勉 총리 비서실장이었는데, 李承晩 반대노선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승만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내..

가난한 대통령

가난한 대통령 이동현(李東炫)_전 중앙일보 기자 가방 4개가 전부였던 하와이행 이삿짐 1960년 5월 29일 오전 8시 30분. 약 한달 전 대통령직에서 하야한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태운 CAT(B-1004호) 항공기가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향했다. ‘늦어도 한두 달 후에 돌아올테니 집 좀 잘 봐달라’며 측근들에게 당부하고 떠난 길이 5년 2개월간 ‘망명 아닌 망명’이 될 줄은 두 사람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시 이 박사 부부가 소지한 짐이라곤 옷가지를 담은 2개의 트렁크와 약품과 마실 것, 샌드위치 등이 담긴 상자 하나, 그리고 평소 쓰던 타이프라이터 등 가방 4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박사 부부의 출국 직후 국내에선 이들의 재산도피 문제가 커다란 화제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