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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콜럼버스'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콜럼버스' 최정호 ㅣ 동아일보 객원대기자, 울산대 석좌교수 오타 시크.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 이라 일컫던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공산주의 운동의 주역 두브체크와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던 경제학자. 그러나 그해 여름 소련의 전차부대가 침공해 프라하의 개혁운동을 짓밟아버리자 스위스로 망명해 대학 강단에 섰다는 얘기까진 들었다. 최근 한양대의 권영훈 교수로부터 스위스 유학시절에 만난 오타 시크의 강의에 관한 회고담을 들었다. 특히 재미있던 것은 일당독재 국가에 사는 오타 시크의 요령 십계명. 1. 바보가 되라. 2. 그게 안 되면 생각하지 마라. 3. 생각은 해도 말하지 마라. 4. 말은 해도 글은 쓰지 마라. 5. 글은 써도 서명은 하지 마라. 6. ..

대전략가 닉슨의 이승만 격찬

대전략가 닉슨의 이승만 격찬 趙甲濟 1953년 가을 닉슨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親書를 갖고 있었다. 닉슨을 만난 駐韓 미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비슷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휴전에 반대해온 李承晩 대통령이 북한군을 독단으로 공격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李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공격을 해놓으면 미국은 한국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誤判하고 있을지 모른다. 닉슨은 브릭스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사관에서 만났다. 특별 협상팀을 이끌고 있던 아서 딘은 닉슨이 이승만에게 전달할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것을 알고 말했다. 그는 李承晩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그로부터..

유영익 "왜 나쁜 점만 부각시키나..좋은 점 연구 외면하는 한국학계"

유영익 "왜 나쁜 점만 부각시키나..좋은 점 연구 외면하는 한국학계"용미(用美)의 카리스마 이승만, 영어-국제법-세계사등 실력으로 美 휘어잡다제12회 이승만 포럼, '이승만의 업적' 평가와 비판 “이승만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공정하게 인식해야”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공정하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의 나쁜 면만 부각시켰다” 유영익 교수(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적어도 잘한 점은 7이고, 못한 점은 3”이라고 평가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0여 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정리하고 분석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역사를 가르쳤던 유 교수는 “이승만처럼 탁월한 인물은 보지 못했다. 우리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월간조선 북한은 1946년 3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땅을 거저 받게 된 북한 농민들은 “33세의 김일성이 어버이처럼 보였다”고 감격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식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매매치 못하며 소작 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하며 상속도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토지 분배는 지주들의 토지를 국가가 빼앗은 다음 농민들에게 소작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형태였다. 수확량의 3할에 해당하는 현물세는 국가에 내는 소작료나 다름없으니 북한 농민들은 지주 대신 국가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박갑동(朴甲東) 씨(남로당 지하총책 출신으로 6․2..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봅시다

현대적 국민국가 기틀 잡고, 한미동맹 통해 국가안보 기초 세워 특히 책임있는 자영농을 육성한 농지개혁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작이었다. 6·25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이 장담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농지개혁 덕이 컸다. 또한 의무교육제도 도입 등으로 대부분 문맹이었던 국민을 교육시켜 시민으로 만들었다. 월간조선 [일사일언]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봅시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늘 말석을 차지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필자도 대학시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당시 풍미하던 '사회과학' 서적들의 수정주의적 해석에 영향을 받아 그를 '나라를 망친 독재자'이자 '분단의 원흉'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통치스타일은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다. 독선적이고..

代이은 이승만 사랑 “아직도 목말라요”

代이은 이승만 사랑 “아직도 목말라요” “건국대통령 연구에 써 달라” 수백억 재산 쾌척한 최송옥 씨 “반듯한 기념관 세워 이 대통령 업적 바로 알리는 것이 소원” 온종림 기자 다른 기사 보기 해방 전엔 경기도 연천에 살았다. ‘부자’ 소리 듣고 살던 집. 사랑방엔 손님들은 끝없이 드나들었다. 본인이 “이만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없으면 몇날 며칠 머물러도 반기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돕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단 두 가지를 가르쳤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독립정신이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딸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조회 때마다 치러지는 황국신민선서 낭독시간에 선서 대신 “하나님, 빨리 일본이 패배해서 우리 조선이 독립하게 해주..

김일성과 이승만 내각의 친일파들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들.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즉 일본간첩출신)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1940년대 쓴 일기 등 중요 자료 발견 조선일보 2012-10-27 TPP [B4면] "오전 11시에 정한경, 이원순, 이매리, 임병직 등을 만났다. 나는 전후(戰後) 대한민국의 선거 방법과 헌법 구상을 준비하기 위해 프린스턴대 슬라이 박사를 한국 행정부의 고문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1944년 4월 21일, 이승만 일기 중·사진)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영문 사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세워질 한국 정부의 헌법제정과 선거 방법에 ..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해양법 전공자 이승만 박사 때문에 일본도 쩔쩔매었다 김성국 기자 ▲ 1950.10.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 자료: 6·25전쟁60주년 사업위원회(국가기록원 / NARA /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은 슬픈 상처를 남기고 있다. 김일성이 저지른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민간인 피해만 100여만명에 이른다. 종북주의자들은 같은 시기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혹독한 반면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있다. 종북주의자들은 살인마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건국의 아버지는 홀대 우리나라 역사상 잘못 평가된 대통령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한 명에 속한다. 무릇 한 국의 건국에 기초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써 일그러진 평가를 받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의 역사적 위치

이 주 영 (李柱郢, 건국대 사학과 교수) 위정척사파에 맞선 문명개화파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생애는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 속했던 김구, 김규식, 안창호,이동휘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그가 미국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안에서도 문필가로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지와싱톤(학사)과 하바드(석사)을 거처 프린스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 데, 당시에 그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아시아 인으로서도 최고의 학력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실상의 지도 교수는 얼마 후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총장이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은 프린스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를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

평화선 '선포한 우남의 선견지명

이혜복 ㅣ (사)대한언론인의 상임고문 · 제1공화국 시절 동아일보 사회부장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은 애국자로서의 면모, 정치가로서의 백년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통찰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3년 초 봄, 스탈린이 죽자 소련은 휴전을 제의했고 서유럽 민주우방 역시 2차대전 후 복구계획이 지연될 것을 염려, 전쟁의 장기화를 꺼렸다. 미국 내 여론도 '전쟁 조기 종결'로 돌아서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전에 한국전선을 시찰, 휴전방침을 굳혔던 것이다. 그래서 휴전회담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어 조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적화통일 막은 이승만, 좌파가 철저히 말살했다"

“적화통일 막은 이승만, 좌파가 철저히 말살했다" 이주영 “북한의 철천지 원수, 교과서에서 지워버려…남북합작 전술 진행중” 온종림 기자 “좌파의 입장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원수였습니다. 이 전 대통령 때문에 적화통일을 못이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좌경화된 학계가 이 전 대통령을 죽이다 못해 아예 역사에서 지운 겁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연구에 정통한 이주영 전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의 ‘이승만 홀대’를 이렇게 짚었다. 이 교수는 평북 용천 출생이다. 1948년 2월 월남해 서울대, 서울대 대학원 사학과를 나왔고 미국 하와이대와 서강대 대학원에서 미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이승만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교 ..

李承晩과 미국의 퓨리타니즘

李承晩과 미국의 퓨리타니즘 정성화 ㅣ 명지대 사학과 교수 미국적 생활방식이 성공모델 19세기말 일본과 서구열강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의 광풍이 한반도에 몰려 온지 벌써 백 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군사혁명 등을 거치면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불행한 한 세기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상황은 아직도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어시아 등 제국주의시대에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던 국가들이 아직도 한반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우리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지만 구한말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정과 부패, 국론 분열과 지도력 부재 등으로 방..

國益을 위해 세번 미국과 死鬪한 이승만

△ 아래는 8월11일 오후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제77회 조갑제의 현대사 강좌」 중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강연 중 일부를 정리한 내용이다. 金成昱 박정희(朴正熙)의 업적은 설명하기 쉽지만, 이승만(李承晩)은 설명이 어렵다. 「韓美동맹, 교육개혁, 농지개혁, 자유민주주의...」이승만이 이룬 것은 눈에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의 눈에 보이는 근대화는 이승만이 만들어 낸 성취(成就) 위에서 가능했다. 이승만은 위대한 일을 이루곤 동네북이 됐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라, 오면초가이다. 김일성은 온 힘을 다해 이승만을 깎아내렸고, 친북좌익이 부화뇌동해왔다. 박정희는 물론, 4·19를 주도한 세대도 이승만 평가에 인색하다. 후손(後孫)도 번성하질 못했다. 내가 아니고, 여러분이 아니면 이승만을 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