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추천도서 815

이승만 농지개혁, 남한 공산화 막은 결단

“이승만 농지개혁, 남한 공산화 막은 결단”김성호 농경연 고문 “농민과 사업가 지원, 대한민국 경제 건설 토대 일궈온종림 기자 다른 기사 보기 김성호 농촌경제연구원 고문 ⓒ 뉴데일리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시국을 정확하게 본 결단이었다.” 20일 오후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우남이승만연구회 제46차 콜로퀴엄에서 강사로 나선 김성호 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이승만과 농지개혁’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평가했다. 지난 1989년 ‘농지개혁사연구’를 펴낸 김 고문은 한국 농지개혁 연구 전문가. 김 고문은 이날 발표를 통해 “좌익세력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북한 토지개혁을 높게 평가하고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한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폄하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김 고문은..

제주4.3과 이승만

제주4.3과 이승만written by. 이현오 우남 이승만 연구회 콜로퀴엄.... 4.3사건 당시 토벌대 요원도 나와 증언 우남 이승만 연구회(회장 이주영 교수)와 (사)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는 17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정동교회 아펜셀러 홀에서 우남 이승만연구회 제47차 콜로퀴엄을 열고 '제주4.3과 이승만'을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 날 강연회의 초청 강사로 나선 국방대학교 손경호 교수는 제주4.3의 발생배경과 1945년 일제패망이후 제주에서 이 같은 이념적 소용돌이가 태동하게 된 동인을 짚고 이어 청중의 보충발언 및 질의 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 날 강연회에는 당시 국방경비대 7연대 소속으로 제주 무장폭동에 대한 토벌대 일원으로 참여한 최현문씨가 나와 당시의 상..

청년 이승만 "상투를 잘라야 한국이 산다"

 상투를 잘라야 한국이 산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 1905년 외교관 예복을 갖춰 입은 청년 이승만. 1909. 8. 29~1910. 8. 29 "한국은 현재 남의 나라에 상투 잡혀서 꼼짝 못하고 스스로 사망신고서를 바치고 있는 꼴을 하고 있지요. 한참은 청인(淸人)이 내 상투를 잡았지요. 그 후에 일본인이 빼앗아 쥐더니, 아라사(러시아) 양반이 얼마 주므르더니, 왜(倭) 상전님네가 다시 움켜쥐었지요." 이승만은 1909년 9월 9일 신한민보에 '상투를 없애야 되어'라는 글을 기고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다. 논문 쓰기도 바쁠 텐데 '한가하게' 상투 얘기를 신문에 기고한 까닭은 뭘까.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04년 말, 독립활동 혐의로 7..

'건국 대통령' 동상은 왜 안 세우나?

 '건국 대통령' 동상은 왜 안 세우나?김성영·전 성결대 총장 지난 한글날,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지도자의 상징물이 그곳에 들어선 것을 국민들은 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행사를 지켜본 필자의 마음은 한편 착잡했다. 우리는 지금 봉건왕조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쓰는 엄연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에 대한 상징화 작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남(雩南)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이토록 소홀히 예우해도 되는지 유감을 떨칠 수 없다. 국가정체성 강화를 위해 '동상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도산공원에서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볼 때..

이승만 1949년 “북한 인권 위해 싸우자”

이승만 1949년 “북한 인권 위해 싸우자”담화문 통해 “인권 보장 위해 싸워야 한다” 호소온종림 기자 다른 기사 보기 “우리는 인권 보증(보장)을 위하여 공산당과 싸워야 한다.” 재미교포 북한인권운동가 로버트 박이 북한 수용소 해방 등 북한 동포의 인권을 위해 입북한 가운데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1949년 10월 7일 북한의 인권 보장을 위해 결사투쟁하자고 호소한 바가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 자료사진이승만 박사는 이날 발표한 ‘공산당과 협의불가 ㅡ 인권보증에 결사투쟁’이라는 담화문을 통해 “(UN에) 앞으로 이북 공산당의 인도자들과 합석하여 협의한다는 것은 아니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권보증을 위하여 공산당과 싸워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 박사는 또 “UN은 민..

건국대통령 동상 하나없는 서울은 수치다

건국대통령 동상 하나없는 서울은 수치다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 인식의 출발점양영태 객원칼럼니스트/자유언론인협회장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건국사는 곧 대한민국 시작을 알리는 역사의 핵심이자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어주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의 자유국가로 건국시킨 건국대통령의 동상 하나 제대로 수도 서울 내에 세우지 않았거나 못했던 과거 대통령들의 역사인식 없는 모습은 국민으로 하여금 과거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유발할 수 없도록 한 요인이다. 국가 지도자로 호칭되는 분들이 건국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면 그러한 국가지도자는 국민으로부터 지도적 역량과 함량을 의심받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도, 민주국가 대한민국도 이 땅에 ..

이승만 평화선은 역사적 대업적

이승만 평화선은 역사적 대업적  김남균 평택대 교수 “일본 상대로 해양 주권 방어”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平和線)은 고려시대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으로 획득한 강동6주에 버금가는 역사적 업적이다. 두고두고 우리 역사 속에서 이야기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18일 선포한 해양주권선인 '평화선'에 대해 김남균 평택대 교수가 높이 평가했다. 김 교수는 지난 22일 오후 정동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우남이승만연구회 53차 콜로퀴엄에서 ‘이승만과 평화선 : 해양 주권의 방어’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주창한 지 30년 지난 1982년에 유엔에서 국제해양법으로 ‘EEZ’(Exclusive Economic Zone, 배..

이승만, 백성이 주인되는 입헌군주제 추진 혁명가

“이승만, 백성이 주인되는 입헌군주제 추진 혁명가”이승만 박사 탄신 135주년 기념 학술회의 열려 “카이로 선언 이끌어낸 빼어난 현실적 외교가”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탄신 135주년을 맞이해 이승만 박사의 독립정신과 독립외교를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15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는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세미나는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이승만 박사의 민족통합주의’ 발표로 시작됐다. 양동안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며 “민족주의 중에도 민족 통합주의에 가깝다”고 전했다. 민족통합주의란, 초계급적인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의 조직, 운영 원리로..

이승만의 '독립정신' 동서문화사 재발간

이승만의 '독립정신' 동서문화사 재발간이승만의 자주적 세계주의가 학생과 군인들에게 조영환 편집인 이승만 박사의 옥중서신인 독립정신이 동서문화사에서 재발간 되었다. '독립정신'은 이승만 박사가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자 국민 계몽서이다. 이 독립정신에는 대한민국의 선진화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자유민주주의, 세계개방주의, 자유시장경제 등을 애국적 관점에서 정리했다. 100년 전에 선언한 이승만의 통치철학은 100년 후에도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전진성, 규범성,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건국 60주년이 되던 2008년 7월, 김효선 한국논..

민주투사 이승만

민주투사 이승만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어떤 군주, 국왕, 대통령 또는 수상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통치자인가 하는 문제는 수천 년 동안 논의가 되어 왔지만 확실한 답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세사에 등장한 위대한 정치인들을 몇 사람만 살펴보아도 근사한 답은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처칠, 프랑스의 드골, 중국의 손문, 한국의 이승만을 검토해 보면 이들이 한결같이 지니고 있었던 어떤 철학이 뚜렷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념, 이상 또는 철학을 구현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악전고투를 한 사실이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각자 역사의 무대 위에서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처칠이나 드골은 히틀러의 침략주의에 굴복하는 것은 영국..

"美, 이승만 '제거계획' 9번이나 세웠다"

美, 이승만 '제거계획' 9번이나 세웠다 "이승만 없었다면 한국은 ‘공산화의 길’ 재촉했을 것".. 유지호 전 대사 프리존뉴스(김필재) 미국과 UN이 6.25전쟁당시 휴전협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지호 전 예멘대사는 월간 ‘한국논단’(발행인 이도형) 최신호에 게재한 ‘건국 60주년 기념특집: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다’는 제목의 글에서 맥스웰 D. 테일러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도한 ‘에버레디 작전’(Ever ready Operation)을 언급하며 이 같이 주장했다. 유 전 대사는 리지웨이 중장의 뒤를 이어 6.25전쟁의 종전을 주도했던 테일러 대장이 미 육군참모총장·케네디 대통령 군사보좌관으로 근무 후, 합참의장·주 베트남 대사..

4 ·19로 끝난 리승만 제거 음모

 4 ·19로 끝난 리승만 제거 음모 박일영 ㅣ 자유기고가 1960년의 4월은 잔인하였다. 3 · 15 정 ˙ 부통령 부정 선거를 백지화하고 선거를 다시 하라는 학생들의 시위는 마침내 리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정권 타도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남한의 여러 도시를 휩쓴 학생 시위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동남아의 여러 나라로까지 번졌다. 서울에서 세계로 번진 스튜던트 파워 한국의 학생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서쪽으로 옮아가는 가운데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이 무너지고 프랑스의 그 위세 당당한 드골 대통령도 손을 들었다. 일제 강점의 35년의 세월고 맞먹는 한 세대를 지낸 지금의 50대들은 그 회오리와 같았던 60년대를 되돌아 보면서 오늘의 젊은 세대를 생각할 것이다. 한 나라의 정권이 학생들의 시위로 쉽..

모국의 건국대통령이 누구지?

이승만의 스승 서재필과 이승만의 지지자 서재필 서재필 박사는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1894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 망명한 한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며 의학박사 학위 소유자이다. 1895년 말 미국 시민권자로 귀국한 서재필 박사는 배재학당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독립협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개화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박영효를 중심으로 혁신내각을 구성하려고 일으킨 이른바 '무술년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다시 미국으로 추방된다. 이승만 박사의 배재학당 스승이기도 한 서재필 박사는 일제의 병탄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이 상실되자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펼쳤다. 서재필 박사는 이승만과 동일한 독립노선인 외교독립노선을 걸었던 해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태평로] 대한민국 60년, ‘자부심’이냐 ‘반성’이냐

[태평로] 대한민국 60년, ‘자부심’이냐 ‘반성’이냐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입력 : 2007.08.20 22:41 / 수정 : 2007.08.20 23:14 내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다. 일제의 40년 강점에서 벗어난 지 3년 만의 정부 수립은 우리 민족도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명실상부한 근대국가를 만들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차례로 이룬 드문 국가로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사례가 됐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지금쯤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건국 60주년을 경축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할 법하다. 더구나 우리는 10년 전 외환위기에 휩싸여 건국 50주년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환..

광복 3년만에 자유·민주국가 첫걸음

광복 3년만에 자유·민주국가 첫걸음 “건국으로서의 8·15는 아직 진행형” 이한우 기자 hwlee@chosun.com 입력 : 2007.08.14 00:3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다음날부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대표적인 정치 결사체로 부상했다. 초기에는 중도 우파의 안재홍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통일된 정부가 들어설 것을 의심했던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점차 분단의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건국(建國)’이라는 말보다는 독립(獨立)이라는 말이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10월 16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고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정치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