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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은 이승만의 이상이 실현된 것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이상이 실현된 것 한미동맹을 통해서 우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필생의 이상과 숙원과 집념을 볼 수 있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미동맹은 6.25사변을 직접적인 계기로 해서 성립되었지만 사실은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개인적 이상(理想)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승만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미동맹은 애당초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필생의 숙원이었다. 한미동맹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승만이라는 한 개인의 일생을 통한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아직 단언할 수는 없으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그 시기까지 독립운동을 한 그 누구도 ..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의 偉業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의 偉業 (The Great Achievements of President Syngman Rhee) 1. 한국의 개화와 구국 및 독립운동을 영도(1898-1945) a. 을 창간하여 개화의 선봉이 되다(1898) b.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개회하여 구국운동을 주도 c.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을 영도 d.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1919-1925) e. 와싱턴 D.C.에 집정관총재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독립공채를 발행 f. 한인기독교회(KCC)와 기독학원(KCI)을 설립하고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여 홍 보와 외교를 통한 합법적인 한국독립운동을 영도(1918-1945) g.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대한 한국독립외교를 추진 ..

이승만의 독립운동기 군사외교 활동

이승만의 독립운동기 군사외교 활동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Ⅰ. 태평양 전쟁기 이승만의 군사 외교노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한정책은 두 가지 중요한 방침을 정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둘째, 임시정부 승인은 현실성을 결여한 정책이지만, 비정규 한국군(게릴라부대) 창설 계획은 전쟁 수행 상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이제까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평화적이면서 간접적인 외교노선과는 달리 임시정부와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지지성명과 대일 선전포고를 하도록 적극 권유하는가 하면, 미국에 대해서는 한인부대 창설 및 무기대여법((武器貸..

태평양전쟁과 이승만의 獨立運動의 方略(방약)

태평양전쟁과 이승만의 獨立運動의 方略: 反蘇路線과 外交論을 중심으로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 I. 4.19이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5.16군사혁명이후의 국정교과서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로 독재를 연장하려다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났다.’는 식으로 기술된 것이 일반적인 대세였다. 이런 식의 이승만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적 기술은 지금까지 계속되어서 금성출판사가 발간한 고등학교 교재 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의 등장이후 전개된 ‘대한민국의 정체성 흔들기 작업’의 심각한 폐해를 몸소 체험한 국민들은 과거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건국 60주년을 전후로 해서 이승만연구모임이 활성화되었고, 건국사를 재조명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 분위..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한 대통령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한 대통령 소년시절 과거 준비하던 이승만 '독도는 우리땅' 세계 알려 1.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한 당시 기사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건국의 아버지로서 높이 평가 하는가 하면 친일인사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노력을 기울인 독재 정치가로 악평도 한다. 1965년 그가 운명한지 이제 50년이 지나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때가 왔다. 그는 30세 때인 1904년 도미하여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친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일상생활을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에 체류 중 내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

李承晩박사는 민족분단의 원흉인가?

 李承晩박사는 민족분단의 원흉인가?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세 가지 논거들의 타당성 따져봐야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우리 민족의 분단에 앞장선 "민족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한다. 李박사를 "민족분단의 원흉"이라고 비한하는 일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밑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는 다음 세 ..

李承晩박사는 反民衆的이었나?

李承晩박사는 反民衆的이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민중의 뜻에 따라 나라를 일으키자" 李承晩 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반민중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李박사가 민중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뜻을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민중의 고통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李박사에 대한 이러한 비한은 李박사의 ..

李承晩박사는 '친일파'를 비호했나?

李承晩박사는 '친일파'를 비호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1) "李박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친일파들이었다?"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친일파를 자시의 추종세력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 협력 친일파를 비호하고 고관으로 많이 기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

李承晩박사는 미국의 앞잡이었나?

李承晩박사는 미국의 앞잡이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1) 실제로 정반대 되는 논거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일반 대중에게도 크게 확산되어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라는 관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의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의車相哲 충남대교수 2005년은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한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100주년과 8·15 해방 60주년, 그리고 정전협정과 한미동맹 성립 52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은 1세기 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태프트-카츠라 밀약`(1905)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한국 국민은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다고 비난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과의 회담과 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미국의 `배신행위`를 되풀이해서 상기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국가이익을 위해 한..

건국대통령은 없다?

건국대통령은 없다? 권영빈 ㅣ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수백만 동포가 기다리고 있다" 1945년 9월 오키나와 주둔군 존 하지중장은 남한 군정 책임자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온다. 이 무렵 평양엔 이미 소련군이 진주했었다.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아직도 미국에 머물고 있던 우남 이승만을 만났다. 소련 영향권에 위치한 한국은 소련과 협조할 수밖에 없고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정부 설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올리버는 이승만 혼자 독자적 독립노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한다. 한참 정적이 흐른 뒤 이승만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것을 당신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연연해 나라를 소련에 넘길 궁리나 할것 같습니까. 수백만 동포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속이..

자유통일은 북진 통일이다

자유통일은 곧 북진통일이다! 2008. 4. 23. 정창인(unifykorea.net/자유통일포럼 대표) 자유통일은 대한민국이 주도하여 북한동포를 해방하고 자유민주체제 하에 북한을 흡수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일 공산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를 북한 지역으로 확대하여 실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유의 북진, 즉 자유의 북한지역에로의 확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통일은 북진통일을 의미한다. 자유의 북진을 의미하며 자유민주체제의 북진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남진하는 세력은 다 망했다. 고구려가 남진하다가 망했고 백제도 남진하다가 망했다. 북한도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다만 김일성/김정일의 독재가 너무도 잔인하여 북한 주민이 움직일 틈이 없고..

국민에게 희망을 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국민에게 희망을 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북진통일론, 대한민국 주도 ‘자유통일’ 의미 김필재 기자 “이북동포 여러분 나와 같이 결심합시다. 공산군이 어디서 들어오든지 그것이 소련이건 중공이건 들어오려면 들어오너라. 우리는 죽기로 싸워서 물리치며 이 땅에서는 발붙이고 살지 못할 것을 세계에 선언합시다.” (이승만 대통령, 1950년 10월29일 평양 연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을 오늘에 와서 검토해 보면 대단히 뛰어난 정치기술의 하나로 북한의 중·소 군사동맹과 같은 한·미사호방위조약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철승 前 신민당 총재, 現 헌정회장, 1988년 신동아 10월호 인터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제주도에서는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5.10 총선거 방해를 비롯, 전국적..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로버트 올리버 한국에는 이승만 박사를 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부패한 독재자라고 부르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나는 23년간 이 박사와 친교를 나누어 왔고 18년간 그의 미국내 고문 겸 대리인이었다. 이 박사를 비난하는 사람 중에는 나와 이 박사의 이러한 관계를 근거로 들어 내가 "이 박사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이다"고 비판하지만, 그러는 그들은 "이 박사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박사는 과연 독재자였는가.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비판자들은 이런 것을 근거로 이 박사는 재임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이 박사가 언론자유를 폭넓게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

국가 기틀 세운 업적, 제대로 평가받아야

국가 기틀 세운 업적, 제대로 평가받아야 김지호 ㅣ 주)센추리(CTN) TV 대표이사 10대 가수처럼 뽑는 대통령 순위 초대 건국 대통령에 관한 프로그램 제작을 마음먹은 것은 6년전. 지금의 선배들이나 학자들도 다 떠나시면 어쩌나 싶었다. 이것 큰일이다 생각되어 겁없이 덤볐다. 다행히 필자의 조부님이 평리원판사(지금의 대법원) 시절, 李박사를 석방해 주셨고 그런 연유로 초대 공보처를 맡으셨던 철니부 김동성 장관과, 대통령과 독립운동을 하셨던 임병직 초대 UN대사가 李 대통령 하야 후 필자의 앞집인 서울 계동으로 이사오시게 되었는데, 필자의 선친과 나누시던 李 대통령에 관한 말씀을 옆에서 듣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거인의 생애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 부담도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