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다

Joyfule 2024. 3. 13. 23:14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다(롬8:29-30)



 예정론을 잘 모르고 다 예정되었다고 하면 동양운명론 같이 되고,

또 인간이 스스로의 결단으로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데 제한이

되었다고 하면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정론과 알미니안이 싸웁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 100%, 인간 100%라는 말도 만들어 냅니다.

성경에 예정에 대한 말씀은 롬8:29-30절과 고전 2:9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이라고 하시고, 엡1:4-5에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예정의 유무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고전2:9)

오직 성령으로만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성령이 가르쳐 주십니다(고전2:10,13)

사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다는 말씀은 롬8장에서도 깊숙하게

들어와야만 비로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예지 예정하셨구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무나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서 뒤돌아보니 택한 자만 하는

문구가 붙어 있더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예지예정을 아무도 모릅니다.

 

Q. 무엇을 주시려고 예지 예정하셨는가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A.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일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이 합쳐져서 선이 되도록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는데 행불행이나 형통과 불통이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으로는 미리 정하셨다 또는 예지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한정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만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구원의 개표상황과 같기 때문에 이미 되어 진 사실을 계시로 보고

내가 거기에 들어 있는지의 여부를 미리 아는 것이지 거기서 끼어드는 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형상을 본 받을 사람으로 한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부모들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대충 알아집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미리 그리스도 안에 한정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곧 같은 형태에 참예하도록 한정되었습니다.

창세전이라면 인간세상 이전인데 인간이 등장하기 전의 창1장을 보면

하나님의 설계도가 미리 정해진 가운데 아담이 만들어지고 타락한 후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담의 죄와 뒤 설거지를

청산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므로 듣고 믿어 성령의 인침을 받습니다(엡2:13)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을 우리에게 성취하는

작정과 섭리 가운데 우리의 인생의 잘 잘못 모두가 다 합산이 되어 선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이나 역경 속에서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 왜 그래요 하고

따진다면 하나님께서 ‘네 형처럼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형님이 누군데요? 하고 물으면 ‘넌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나의 맏아들 말이야’하시겠지요?

우리 인생의 모든 여정의 순경과 역경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합하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에 집중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렇게 모진 비바람이 불고, 그렇게 어려웠던 시간들이

하나님께서 내 욕심을 제하시고, 자아를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주셔서 영원한 영광에 참예하게 하시려고 한 일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흡사 바둑고수와 바둑 한 판 둔거나 다름없이 그 실력에 질질 끌려 압도당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아집니다.

그 격차는 유별하지만 차별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지전능하심은

본 받지 못 해도 하나님의 그 형상과 사랑의 속성은 우리가 물려받아 상속을 받습니다.

그 일에 우리의 모든 인생 여정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놀라운 복입니다.

‘그 맏아들’ 맏아들이란 것은 상품으로 치면 시제품으로 생각하십시오.

시제품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부턴 팡팡 찍어 냅니다. 양산해 나갑니다.

우리는 독생자로 말미암아 하나씩 피조가 되는 다생자가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12: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전 세계에서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 예지 예정의 결말이 무엇인가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A. 쉽게 말하자면 상품으로 예를 들어 이런 제품만 만들자는 뜻입니다.

이걸 예지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칭의)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신학으로 말하는 성화라는 말이 왜 없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시면 바로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바울이 새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합니다(고후3:17-18) 형상과 영광 사이에 성화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이 된 말씀과 인간의 관점에서 기록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음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우리는 성화라는 신학적인 용어의 눈금으로 사람들의 변화를 바로미터로 삼지만

하나님께서는 알파면 오메가이시고 시작이면 끝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는

성화라는 단계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연하자면 신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지식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성령이 계시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고, 다시 자신의

관점에서 성경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