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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지졸 열두지파

최용우의 햇볕같은 이야기 오합지졸 열두지파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승장구하여 가나안을 점령한 후 각 지역을 분배받아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때는 12족장 협의체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각 지파의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고 성막을 중심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실로’에 성막을 세우고 예배와 제사같은 영적인 훈련의 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실로와 멀리 떨어진 지파부터 점점 거리상의 문제와 인구의 증가로 인해 성막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약속의 땅을 정..

열두지파

최용우의 햇볕같은 이야기 열두지파 인류의 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동행하심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본능의 양심을 따라 살았던 원시시대와 분명하고 확실한 ‘계명’을 주신 성문시대를 지나 각 족장들이 다스리는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동행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이 서로 자식 낳기 경쟁을 펼친 결과 4명의 여자에게서 12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옛날 우리 동네에도 혼자서 한 타스를 낳은 대단한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밴은 감히 서모를 겁탈하는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장자권을 요셉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12지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로 야곱의 열두 아들 이름을 따서 12지파가 아닙니..

요단강 건너 탈출하려면

최용우의 햇볕같은 이야기 요단강 건너 탈출하려면 홍해를 건너 광야학교에 입학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생활방식을 벗겨내고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기 위해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온갖 필요한 교제를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래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경(經)입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성경(聖經 bible)을 ‘오직성경’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을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글은 ‘십계명’이 유일합니다.(다른 글은 사람이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십계명만큼은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봅시다

현대적 국민국가 기틀 잡고, 한미동맹 통해 국가안보 기초 세워 특히 책임있는 자영농을 육성한 농지개혁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작이었다. 6·25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이 장담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농지개혁 덕이 컸다. 또한 의무교육제도 도입 등으로 대부분 문맹이었던 국민을 교육시켜 시민으로 만들었다. 월간조선 [일사일언]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봅시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늘 말석을 차지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필자도 대학시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당시 풍미하던 '사회과학' 서적들의 수정주의적 해석에 영향을 받아 그를 '나라를 망친 독재자'이자 '분단의 원흉'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통치스타일은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다. 독선적이고..

代이은 이승만 사랑 “아직도 목말라요”

代이은 이승만 사랑 “아직도 목말라요” “건국대통령 연구에 써 달라” 수백억 재산 쾌척한 최송옥 씨 “반듯한 기념관 세워 이 대통령 업적 바로 알리는 것이 소원” 온종림 기자 다른 기사 보기 해방 전엔 경기도 연천에 살았다. ‘부자’ 소리 듣고 살던 집. 사랑방엔 손님들은 끝없이 드나들었다. 본인이 “이만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없으면 몇날 며칠 머물러도 반기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돕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단 두 가지를 가르쳤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독립정신이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딸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조회 때마다 치러지는 황국신민선서 낭독시간에 선서 대신 “하나님, 빨리 일본이 패배해서 우리 조선이 독립하게 해주..

홍해 건너 탈출

최용우의 햇볕같은 이야기 홍해 건너 탈출 초등학교 때 집안에 불쌍까지 앉혀놓고 온 식구들이 불교에 심취해 있던 경욱이네집 내 친구 경욱이를 오랫동안 공을 들인 끝에 전도했습니다. 문제는 주일 아침에 교회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집안 식구들이 무서워 교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밖에서 “경욱아 노올자~!” 하고 부르면 “그래, 놀자” 하고 나오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주일 아침마다 경욱이를 불러내다가 그만 들켰습니다. 그래서 몰래 담 넘어 나온 날도 있었고, 전날 “용우네 집에서 공부 하다가 늦으면 자고 올께요.” 우리 집에서 밤새 놀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기도 했습니다. (경욱이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며 살까?) 한 영혼이 교회 문을 밀고 들어가기는 정말 힘듭니다. 온갖 방해공작을 뚫고 온..

그래도 탈출

최용우의 햇볕같은 이야기 그래도 탈출 제대로 한번 신앙생활을 해보기 위해 애굽을 탈출하는 것은 그동안 몸담고 있던 세상의 사고 체계를 떠나 다른 세상의 사고 방식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삶의 가치관의 변화이고 다른 말로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그동안은 ‘세상 법’을 따라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겠다는 사상체계의 대 변화입니다. 세상인 애굽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발목잡는 것 열 가지가 있었습니다. 처음 세 가지 재앙은 애굽인들이나 이스라엘인들이나 상관없이 모두에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일곱가지 재앙에 비하면 그것은 약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하나님을 모르던 비신자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동안 같은 편이었던 마귀들을..

김일성과 이승만 내각의 친일파들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들.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즉 일본간첩출신)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1940년대 쓴 일기 등 중요 자료 발견 조선일보 2012-10-27 TPP [B4면] "오전 11시에 정한경, 이원순, 이매리, 임병직 등을 만났다. 나는 전후(戰後) 대한민국의 선거 방법과 헌법 구상을 준비하기 위해 프린스턴대 슬라이 박사를 한국 행정부의 고문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1944년 4월 21일, 이승만 일기 중·사진)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영문 사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세워질 한국 정부의 헌법제정과 선거 방법에 ..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해양법 전공자 이승만 박사 때문에 일본도 쩔쩔매었다 김성국 기자 ▲ 1950.10.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 자료: 6·25전쟁60주년 사업위원회(국가기록원 / NARA /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은 슬픈 상처를 남기고 있다. 김일성이 저지른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민간인 피해만 100여만명에 이른다. 종북주의자들은 같은 시기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혹독한 반면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있다. 종북주의자들은 살인마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건국의 아버지는 홀대 우리나라 역사상 잘못 평가된 대통령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한 명에 속한다. 무릇 한 국의 건국에 기초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써 일그러진 평가를 받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의 역사적 위치

이 주 영 (李柱郢, 건국대 사학과 교수) 위정척사파에 맞선 문명개화파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생애는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 속했던 김구, 김규식, 안창호,이동휘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그가 미국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안에서도 문필가로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지와싱톤(학사)과 하바드(석사)을 거처 프린스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 데, 당시에 그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아시아 인으로서도 최고의 학력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실상의 지도 교수는 얼마 후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총장이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은 프린스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를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

평화선 '선포한 우남의 선견지명

이혜복 ㅣ (사)대한언론인의 상임고문 · 제1공화국 시절 동아일보 사회부장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은 애국자로서의 면모, 정치가로서의 백년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통찰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3년 초 봄, 스탈린이 죽자 소련은 휴전을 제의했고 서유럽 민주우방 역시 2차대전 후 복구계획이 지연될 것을 염려, 전쟁의 장기화를 꺼렸다. 미국 내 여론도 '전쟁 조기 종결'로 돌아서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전에 한국전선을 시찰, 휴전방침을 굳혔던 것이다. 그래서 휴전회담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어 조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적화통일 막은 이승만, 좌파가 철저히 말살했다"

“적화통일 막은 이승만, 좌파가 철저히 말살했다" 이주영 “북한의 철천지 원수, 교과서에서 지워버려…남북합작 전술 진행중” 온종림 기자 “좌파의 입장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원수였습니다. 이 전 대통령 때문에 적화통일을 못이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좌경화된 학계가 이 전 대통령을 죽이다 못해 아예 역사에서 지운 겁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연구에 정통한 이주영 전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의 ‘이승만 홀대’를 이렇게 짚었다. 이 교수는 평북 용천 출생이다. 1948년 2월 월남해 서울대, 서울대 대학원 사학과를 나왔고 미국 하와이대와 서강대 대학원에서 미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이승만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