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날마다 죽노라 자랑하시겠는가?

Joyfule 2024. 5. 22. 13:45



날마다 죽노라 자랑하시겠는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절)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로서는 검사의 취조와 같은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믿음이 없어 아담 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정체감이 없으므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하는

현실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삼위 하나님

안에서 펼쳐지는 별세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젖먹이들입니다.

만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와 같은 사람을 모아 목회를 하고 있으면

불행하게도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마24:19)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걸립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 같은 지체 높은 인간도 거듭나지 않으면 혈과 육으로는

영생을 얻을 길이 없으며 율법에 흠이 없었던 바울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한(고전15:1) 부활의 원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돼야 한다고 나팔은 불지만 머리와 입과 몸이 따로따로 노는 중풍병자가 많습니다.

이건 인격 문제가 아니라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는가 아닌가 하는 문젭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믿어지므로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롬10:8)

그러나 한 때 한국교회가 국가적인 고난의 기간을 겪으면서 순교자적인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을 많이 양산했습니다. 요즘이야 그랬다간 교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지만

한 때 우민정책으로 성도들을 희생의 대열에 몰아넣던 때에 헌신을 말할 때에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이야기나 벧세메스로 법궤를 매고

가는 두 암소 이야기가 단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을 들으면

으레 두 사건을 생각할 정도로 십자가가 지긋지긋했습니다. 주님이 형벌을

받으신 그 끔찍한 십자가를 나더러 지라고 한다니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희생일변도로 충성을

다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속에서 반발심이 솟아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회개와 세례가 무엇인지 하는 질문에 로마서가 확실하게

설명하므로 드디어 그리스도와 한 멍에를 매는 것이 쉽고 가볍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로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지는 것이 큰 소와 작은 소가 한 겨리에 묶여

함께 밭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알고 드디어 그 십자가를 지는 게 행복해졌습니다.

송아지는 큰 황소와 같은 한 겨리의 멍에를 매고 따라만 가는 거죠. 그게 2000년

초인가 본데 그 때에 제 생각에는 그리스도와 한 멍에를 매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므로 그 생명이 내 몸과 육체에 나타나는(고후4:10-11) 비법(?)을 주의

일꾼들에게 나누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제 주변에서 이 비밀을 알고 시도하므로 수지를 보는 분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지금의 세상이 너무 좋으니 자신들이 이 세상 삶뿐이면

더욱 불쌍한 존재(고전15:19) 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땅의 포도주 곧 음행의 포도주에 흠뻑 취해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자신이 웃사의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웃사는 아비나답 제사장의 아들로서 법궤는 수레에 실어 운반하면 안 되며

감히 손을 대면 죽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함에도 소들이 뛰놀아 법궤가

흔들리니 덥석 잡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습니다(삼하6:7) 만일 구약마당

같으면 저 부터도 즉결처분을 받아 수천 번 죽었을 겁니다. 은혜의 때는 집행이

유예가 되어 진리로 부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웃사 같은 꼴을 보지 않고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돈 떨어지면 주여, 운전하다가도 주여, 잘못해서 욕을 먹어도

주여, 주님의 이름이 119 긴급출동 전화전호인양 얼마나 방정맞게 불렀는지...

제가 웃사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들여다 보다 죽은 이방인 블레셋이나

손을 대므로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일반입니다.

 

 그제와 어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는 찬송을 부르니 눈물이 나서 남몰래 찔끔거립니다.

그건 구속 받은 이후에 내가 받는 복이 어떠한가를 계산하여 보므로 그렇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복이 바로 구속하심과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발견이 되어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현현하시니

그 영광스러운 기쁨을 두고 자랑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베길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증거하신 다음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미치도록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일괄 그 안에 옮기셨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한 사람씩 발견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망의 권세에서 빼앗아 이미 하늘에 앉힌 것을 점점 깨달아 알아갑니다.

계시는 단회적이지만 점진적이어서 내 속에 서서히 영적인 느낌으로 채우십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십자가의 도가 그리스도께

나의 주권을 이양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며 그 소득이 엄청난 것을 맛봅니다.

그 때부터 바울과 같이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통해 주님 앞에

나아가므로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강한 자존감이 되고 큰 자랑이 되는 겁니다.